01.청양 다락골 성지(탄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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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청양 다락골 성지.
01.청양 다락골 성지.
[23.03.13]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가 탄생한
교우촌이며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
[산샘 박찬희 수산나님의 서예글씨]
"다락골"의 어원은 "달을 안은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청양군에 위치한 '다락골'성지는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와 그의 부친 최경환( 崔京換, 1805~1839) 프란치스코가 탄생한 '새터'와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는 '줄무덤 성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박해의 손길이 충청도 땅에도 거세게 몰아쳐 와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이때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 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 줄무덤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청양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박해라 일컬어지는 신해박해(1791년) 직후였으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최양업 신부의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이 정착한 곳이 바로 다락골이었으며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개된 것은 1791년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이 내포의 사도가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꼬 곤자가(증조모 이씨부인 동생)로 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사망하고, 이어1791년 진산사건(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한 채 천주교 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렀던 일을 발단으로 불거진 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사건)으로 시작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나자, 증조모인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12살의 외아들 최인주(최양업 신부의 조부)를 데리고 서울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교우촌을 형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다락골 교우촌은 서울, 경기, 내포(충청도 북서부)와 전라도 북부지역에 형성된 큰 신앙공동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진좌, 23.03.13 방문당시 사진/사진우, 현재모습]
이곳에 정착한지 4~5년이 지나 최인주는 다락골에서700m 떨어진 새로운 터에 땅을 일궈 농사를 시작하였고 이곳이 바로 새터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는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가 바로 1984년 5월 6일 시성된 최경환 프란치스코이며, 최경환과 결혼한 이성례 마리아(2014년 시복) 사이에 여섯 자녀 중, 장남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입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가족이 좀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해 1830년대 초에 경기 안양의 수리산(修理山)으로 이주할 때가지 다락골은 미래의 성인과 사제, 그리고 순교자들을 길러낸 터전이었습니다.
이 청양 다락골은 또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곳입니다.
다락골 성지에서 처음에 주목받은 곳은 새터였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탄생한 새터가 먼저 답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명 순교자 줄무덤도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교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1, 제2, 제3 줄무덤으로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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