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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장님의 기고글] 하느님 존재 -월간 꿈C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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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부매니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49회   작성일Date 24-04-03 06:55

    본문

    ​ 하느님 존재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 1952~)는 소년 소녀들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싶어서 「소피의 세계」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소피라고 하는 14살의 소녀는 어느 날 이름 모를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한 장 받습니다. 거기에는 "너는 누구냐?"라는 글 한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소피는 그 편지를 받고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거울 속 얼굴은 내가 선택한 얼굴이 아닙니다. 명품 가방은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얼굴은 내가 선택하지 못합니다.

     소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계속 편지가 옵니다. 거기에는 각기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난 뒤 저자는 철학자들이 내놓은 해답들을 소설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이 충족된다고 해도, 인간은 또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앎에 대한 욕구가 그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 본질을 꿰뚫은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BC 399)는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맹자(BC 372?~BC 289?)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인데 그 길을 버리고 경유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떠나 보냄이 있고도 구할 줄 모르니 슬프구나. 사람은 닭과 개가 떠나감이 있으면 바로 그것을 구할 줄 알지만 마음을 떠나 보냄이 있으면 구할 줄을 모르는데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떠나간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맹자」고자 상편)


     그렇습니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걸 잃어버렸는데도, 잃어버렸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윤택해졌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은 잊고 살아갑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인간의 뿌리, 세상의 근원적 뿌리로서의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성인이 볼 때 세상은 변화와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이대호 선수가 홈런을 쳤다고 가정해 봅시다. 공이 저절로 담장 밖으로 날아간 것이 아닙니다. 방망이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또 방망이는 저절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이대호 선수가 휘둘렀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또 이대호 선수는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고 열심히 훈련을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야구 선수들이 먹는 음식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그렇게 원인의 원인을 끝없이 계속 찾아가다 보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소급과정은 무한히 계속될 수 없습니다. 야구공이 날아가는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첫 원인이 있습니다. 그 첫 원인은 스스로 움직이는 모든 운동의 제1원인입니다. 그 제1원인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존재의 원인의 원인을 소급해 가다 보면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제1작용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또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예쁘다 혹은 착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쁘다' 혹은 '착하다'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내재적으로 최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있고, 그 아름다움에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서 미를 말합니다. 추함은 그 최상의 아름다움에서 멀리 떨어진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선함에 대한 기준에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서 착함을 이야기합니다.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어려운 말로 하느님 존재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쉽고 간단하게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신앙 선조들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잡혀서 모진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포졸들이 물어봅니다.

     "너희들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느님이 어떻게 존재한다고 믿느냐?"

     이 질문에 순교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님 얼굴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님이 계시다는 걸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눈길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이곳에 토끼가, 곰이 지나갔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목수를 한번도 본 일이 없어도 산속의 오두막집을 보면, 목수가 그곳에 집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토끼를 보지 못했지만 토끼가 지나간 것을 알고, 오두막집을 보고 목수의 존재를 알듯이 우리는 삼라만상을 보고 하느님의 존재를 압니다."


     -가톨릭 신앙 월간지. 월간 CUM-

      (24년 1월 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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